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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명 : tri-color

원제 : 彩りゆたかに恋人未満

URL : http://www.pixiv.net/novel/show.php?id=5859342







여대생 히키가야 하치만

 

 

다채로운 연인 미만.

 

 

없어, 없어.

 

나─ 토츠카 사이카는, 하숙하는 아파트 2층, 자기 방 현관 앞에서 혼자 당황하고 있었다.

 

없어, 열쇠가 없어.

 

평소 같으면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을 집 열쇠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 모르니 가방 안도 뒤져보았지만, 역시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방을 나올 때 열쇠를 잠그고, 그걸 주머니에 넣는다는 동작은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일일이 의식하지도 않는 행위이기에, 오늘 어째서 열쇠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곤란하네.

 

나는 다시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본다.

 

 

오늘은 오전부터 강의가 있어서, 아침 일찍 여기서 나왔다.

 

지금 현관 열쇠가 잠겨있다는 것은 그 때 제대로 열쇠를 잠갔다는 거겠지.

 

점심시간을 끼고 강의를 듣고 그 후 테니스 서클의 연습에 참가하고 돌아온 게 지금에 이른다.

 

그 사이에 떨어뜨렸을 것 같은 타이밍 이라고 하면.....아.

 

그러고 보니 서클의 부실에서 연습복으로 갈아입었던 거 같네.

 

떨어뜨렸다고 하면 그 때 밖에 없겠지......

 

하지만 부실이 있는 학생회관은 21시에는 폐관해버리니까, 지금 가도 늦었다.

 

대신 찾아 달라고 하기에도 당장 연락 가능한 친구는 다들 대학에서 먼 곳에 살고 있고, 


스페어 키를 빌리려고 해도 여기 집주인은 언제나처럼 부재중이고......사면초가다.

 

아무래도 오늘은 집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그럼, 오늘은 어떻게 넘겨볼까.....

 

──라고, 생각하던 순간.

 

 

"어라, 토츠카?"

 

 

아래층에서 들려오던, 청량감 있는 알토 톤의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멋대로 고양되어 버린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내 기대대로, 그녀가 있었다.

 

 

"하치만......"

 

"오우, 그런 데서 뭐하는 거야?"

 

 

그녀의 이름은 히키가야 하치만. 아래층에 사는 여자애로, 고등학교 동급생이며, 그리고──

 


──나의 오랜 짝사랑 상대이기도 하다.

 

내가 대답에 곤란해 하고 있는데, 그녀는 총총 걸음으로 2층에 올라왔다.

 

옆에 와서, 가지고 있던 슈퍼 비닐봉지를 옆에다 내려놓고, 내게 물어왔다.

 

 

"현관 앞에서 가방 펼쳐놓고..... 혹시 열쇠 잃어버린 거야?"

 

"아, 사실 그래...."

 

 

그녀는 무척 머리 회전이 빨라서, 이런 상황도 순식간에 파악해 준다.

 

 

"읽어버린 장소는 짐작하고 있어?"

 

"아마 서클의 부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건물 문이 닫혔을 거야...."

 

 

라고 전했더니, 그녀는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며, 턱에 손을 괴고 무언가 고민을 했다.

 

 

"그럼, 우리 집에 올래?"

 

 

─머리가 새하얗게 되었다.

 

 

 

***

 

 

 

하치만의 방에 와버렸다.

 

그녀가 해준 자고가라는 권유는 무척 매력적이었지만, 연인도 아닌 남녀가 둘이서, 같은 방에서 숙박한다는 것은 내 윤리관적으로 아웃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거절했지만, 그녀는 ["그럼 일단 밥이라도 같이 먹지 않을래?"] 라며 다시 권유 해왔다.

 

이것 정도는 솔직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결국 호의를 받아들여 방에 들르게 되었던 것이다.

 

랄까나, 나 스스로가 하치만의 방에 들르기 위한 변명을 원했던 걸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지금 그녀는 부엌에서 요리를 준비 중.

 

청바지에 티셔츠라는 심플한 모습에 앞치마를 걸친 모습은 어딘가 스타일리쉬 하게 보인다.

 

 

"토츠카, 뭐 먹고 싶어?"

 

 

앞치마 차림의 그녀에게 넋을 놓고 있었더니, 돌아보며 그녀가 물어왔다.

 

 

"엣.....아아, 하치만이 만드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

 

 

나는 대뜸 그렇게 대답하고, 내가 한 대답을 후회했다.

 

아, 이거 제일 곤란한 대답이 아닐까? 뭔가 요리를 부탁하는 쪽이 좋지 않았을까.

 

 

"아, 저기, 그럼, 굳이 말하자면."

 

 

내가 당황하고 있으니, 하치만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 미안. 물어봐놓고 뭣하지만, 실은 만들 거 처음부터 정해뒀었다." 

 

"엣, 그런 거야."

 

"어어. 조금 있어 보이는 주부 같은 대사를 해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정말, 하치만도 참."

 

 

이런 식으로 그녀가 하는 농담을 나는 언제나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이게 매번 그렇기 때문에, 가끔은 질리지 않을까 라고 생각 해본적도 있지만.

 

그녀는 그 때마다, 부드럽게 미소 지어준다.

 

그리고 나도 그걸 보고는, 놀려진 것도 잊어버리고 웃어 버린다.

 

 

"그래서, 오늘은 뭘 만들어 주는 거야?"

 

"응, 오늘은 친쟈오로스(청초육사 - 고추잡채)를 만들 건데...."

 

"아, 좋아! 밥이 술술 넘어가겠네!"

 

"후우, 다행이다, 피망 싫어하면 어쩌나 했네."

 

"후훗, 나는 야채는 전반적으로 좋아한다구?"

 

 

내가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그녀는 얼굴을 돌렸다. ......귀가 새빨갛다.

 

 

".....그, 그러고 보니 그랬지."

 

"으, 응."

 

 

말을 주고받으며,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녀는 그 남자다운 말투나 성격과는 반대로, 무척이나 수줍음을 많이 타는 일면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에 반응해서 얼굴이 빨개지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그 모습은 평소의 늠름한 그녀와 갭이 있어서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아, 혹시 방금 건 내가 말한 [좋아해.]에 반응한 것이 아닐까.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나까지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 그녀에게 [좋아해.]라고 말해버린 거야.....간접적이지만.

 

겨우 그 정도도 나에게는 얼굴에서 연기가 나올 정도로 부끄러웠다.

 

직접 좋아해 라고 말하면, 진짜로 졸도 해버릴 지도 몰라.

 

그것보다도, 그녀에게 거절당하는 게 무서워서 말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만.

 

 

──그래도 사실은,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말하고 있다.

 

조금 삐져나온 짧은 흑발이 좋아.

 

남들 에게는 조금 꺼려진다고 말해지는, 그 날카로운 눈빛이 좋아.

 

곧게 뻗은 콧날도, 얇은 입술도 좋아.

 

스타일은 좋지만 조금 새우등인 것도 좋아.

 

무슨 일이든 혼자서 맞서 싸우는 강함도.

 

자신 이외에 모든 것을 구하려고 하는 상냥함도.

 

사람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삐뚤어진 부분조차도.

 

그녀의 모든 것이, 좋아.

 

 

──라든가, 모든 것을 알지도 못하는 내가 말하는 것도 우스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럼 토츠카를 위해, 최대한 실력을 발휘해서 맛있는 고추잡채를 만들어 볼까!"

 

"아, 으, 응! 힘내!"

 

 

이런 식으로 장난치고, 수줍은 미소를 가진 그녀가.

 

나는 정말로 좋다.

 

 

 

***

 

 

 

통, 통, 통 조금 기분 좋은 소리가 부엌을 울린다.

 

그녀는 식칼을 능숙하게 다루면서, 도마 위에 올라간 파프리카를 경쾌한 리듬으로 잘게 썰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방해 되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그녀가 요리하는 동안 나는 한가해서 도와주겠다고 나섰지만,

 

 

"응, 괜찮아. 편히 쉬고 있어줘."

 

 

라는 말을 들었다. 특별히 할 것도 없어서 한가했던 나는, 허락 받고 그 근처에서 그녀의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녀가 재료를 다 손질하고 한 숨 돌리려고 할 때, 말을 걸었다.

 

 

"역시 하치만은 식칼 다루는 게 능숙하네."

 

"뭐, 전업주부지망 이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지."

 

"후후, 그랬지."

 

 

그렇다, 그녀는 외모나 성격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전업주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나도 처음 들었을 때는 놀랐다.

 

그녀에게도 의외로 소녀틱한 부분이 있었네, 라고 생각 해버린 것뿐이지만.

 

이유를 물어봤더니, 별건 아냐. 그저 [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라는 듯하다.

 

정말로 그녀답다 랄까, 노골적이라고 할까....

 

그래도 그녀니까, 아마 사회인이 된다고 해도, 전업주부가 된다고 해도, 이래저래 열심히 일하고 있겠지.

 

마지못한 얼굴을 하면서도 일이나 가사에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이 쉽게 상상되어서, 무심코 미소를 지어버린다.

 

아, 그렇지만.

 

내가 만약 그녀와 결혼하면, 그녀는 분명 언제나 웃는 얼굴로 있어주겠지.

 

이것도 주부의 일이니까, 같은 소리를 하면서.

 

갑작스레 그런 망상을 해버려서, 황급히 고개를 저어 흘려버린다.

 

그런, 아직 마음을 전하지도 못했는데, 결혼이라니. 생각이 너무 지나쳤다.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상황은, 마치 그녀와 동거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런 유사체험 같은걸 하고 있으면, 그런 망상이 떠오르는 것도 어느 정도 당연한 것이겠지.

 

이처럼 내가 자기 생각을 정당화 하고 있는 사이에, 그녀는 다음 공정을 착수하기 시작했다.

 

계랑 컵에 물, 술, 설탕에, 간장, 거기다가 물건 사온 봉투에서 꺼낸 가루, 녹말, 굴 소스를 넣고, 젓가락으로 짤깍짤깍 하며 섞는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솟았다.

 

 

"응? 지금 넣은 조미료 같은 건, 일부러 이거 때문에 산거야?"

 

"아ー, 이건 좀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해 볼까 싶어서....뭐 그걸 위한 선행투자 같은 거지."

 

"아, 혹시........으응, 아무것도 아냐."

 

나오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확실히 그녀가 요리를 시작하려고 하는 계기에는 짐작이 가는 점이 있다.

 

그래도 그걸 일부러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모처럼 그녀가 나를 위해서 요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런데 일부러 다른 남자 이야기를 꺼내서, 그에 대한 대항심으로 만드는 거냐고 묻는 것 따위, 추하고 실례일 테니까.

 

그렇지만, 말할 뻔한 시점에서 내가 무엇을 듣고 싶었는지 그녀는 간파했었던 것 같다.

 

 

"뭐, 그, 뭐냐. 계기는 확실히 그거일지는 몰라도.....목적은 어디까지나 전업주부가 되는 거고, 그걸 위한 색시도(度) UP 이니까."

 

 

내가 하지 않았던 질문에, 그녀다운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가......응, 색시도 라니?"

 

 

내가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우뚱 하니,

 

 

"코마치가 전에 말한 적이 있지? 상당히 오래 되었지만."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코마치가? 우웅......기억 안 나네."

 

 

그녀의 여동생인 코마치는, 그녀와는 다르게 사교적인 성격으로, 고등학생 시절에 자주 상급생인 우리들 사이에 섞여있었다.

 

분명 그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것을 그녀가 기억하는 건, 오로지 여동생을 향한 사랑 때문이겠지.

 

그렇게 그녀에게 사랑받는 코마치가, 솔직히 조금 부럽다.

 

 

"그런가. 뭐 색시도 라는 건, 그 녀석의 조어라서. 아마 어감으로 봤을 때 색시가 되는데 필요한 자질 같은 거라고나 할까....나도 자세한건 몰라."

 

"모르는 구나...."

 

 

그녀는 또 이렇게 적당히 말해서, 적당히 흘리고......나를 웃게 만들어 준다.

 

거기에 그녀의 상냥함을 느껴서 따듯한 기분이 들면서도, 조심성 없는 언동을 해서 이런 식으로 배려 받게 되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껴졌다.

 

 

 

 





***

 

 





 

그녀의 길고 유연한 손가락이, 번지르르 적나라하게 광택 나는 살점에 파묻혀 간다.

 

걸죽한 점도 높은 액체가, 그녀의 하얀 손바닥을 요염하게 더럽히고 있다.

 

그녀가 그 손을 움직일 때마다, 그릇 안에서는 찔꺽, 찔꺽 소리를 내며──

 

 

"왜 그래? 토츠카."

 

"아, 아무것도 아냐!"

 

"그, 그래."

 

 

뒤돌아본 그녀에게, 무심코 얼굴을 돌리고 눈을 가렸다.

 

이상하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머리까지 고동이 울린다.

 

 

──그녀가 하고 있던 것은 단순한 요리 공정이다.

 

가늘게 썬 고기를 보울에 넣고, 앞서 만들어 둔 조미료를 더해서 주물러 섞으며 밑간을 한다.

 

그리고 녹말을 풀어 그 위에 버무린다.

 

그런 별거 아닌 작업인데. 그것을 그저 그녀가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행위에 다른 의미를 발견 해버린다.

 

뇌가 멋대로 엉뚱한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 자신의 어처구니없음에 질려하면서도, 이 어쩔 수 없는 흥분을 어떻게든 눌러보려고 진정해, 가라앉아라 라며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가슴을 누르고 깊을 숨을 내 쉬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서 얼굴을 들었다.

 


──찰딱.

 

 

이마에 갑자기 차갑고 촉촉한 느낌.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자마자 떨어져갔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이마에 올려졌다.

 

 

──그것은, 그녀의 왼손 이였다.

 

 

"응─, 열은 없는 거 같은데......"

 

"엣."

 

"응? ......아아, 미안, 왠지 상태 안 좋아 보여서, 열이라도 있는 걸까 싶어서."

 

 

그랬다.

 

그녀는 이런 점이 있었다.

 

가족이외의 인간에게는 언제나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사는 그녀인데, 


갑자기, 마치 변덕처럼, 이쪽의 품안에 기어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아마 그녀의 후배가 그것을[약삭빠르다]라고 했었던 거 같다.

 

말하고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왜냐면.

 

저 그녀에게서.

 

이런 식으로 갑자기 몸을 접촉하고.

 

나를 유혹하는 듯한 말이 걸어진다면.

 

이런 거, 누구든지 착각하고 싶어져.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싶어져.

 

그렇긴 하지만, 수학을 못하는 그녀니까. 분명 계산하고 하는 행동은 아니겠지.

 

오히려, 항상 유지하고 있어야 했을, 남과의 거리감 계산을 잘못 해버려서 한 행동일거라고 생각한다.

 

즉 천연 이라는 것이다.

 

....뭐 그 쪽이 더 질이 안 좋은 기분이 들지만. 

 

어쨌든, 그녀의 저 행동에는 아무 의도도 없는 것이다.

 

라고, 머리로는 생각해도 마음은 알아주지 않아서.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고 싶어져서.

 

더 이상 그녀의 곁에 있으면, 이상 해져 버릴 것 같다.

 

 

".....미안, 조금 쉴게."

 

"엉, 알겠어. .....밥은 먹을 수 있겠어?"

 

"괜찮아, 조금 피곤한 것뿐이니까."

 

"그런가....혹시 좀 그러면, 침대에서 자고 된다고?"

 

 

또 그런 말을.....

 

조금 못을 박아 둘까. 경계심이 얇은 그녀를 위해서.

 

 

──착각할 것 같은 나 자신을 위해서.

 

 

"하치만."

 

"왜 그래?"

 

"신경써주는 건 기쁘지만, 그건 안 돼."

 

"안 돼?"

 

"연인도 아닌 남자를 침대에 오르게 하면, 안 돼."

 

"..........미안."

 

 

──그것은, 무엇에 대한 사죄였던 걸까.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은 확실하게, 내 속에 납덩어리처럼 천천히 맺혔다.

 

 

 

***

 

 

 

공복감에 눈을 떠 보니, 그곳은 익숙하지 않은 방 안.

 

형광등의 빛이 눈부시다.

 

어라 나 뭐 하고 있었지......

 

그렇지, 하치만 에게 저녁밥을 얻어먹게 되어 방에 들러서─

 

 

─그녀의 방에서 잠들어 버린 건가.

 

기분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눈을 감았던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이 착석감이 좋은 좌식 의자에 앉은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 지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나는 얼마나 오래 자고 있었던 거지?

 

문득 옆에 있는 로우테이블을 훑어보니, 거기에 있는 디지털시계의 눈금이 가리키는 시각은 오전 3시.

 

남의 방에서 얼마나 푹 잔걸까, 나는......

 

그리고 로우 테이블의 위에 있는 건 그 밖에도, 랩이 쌓인 접시와 밥그릇과 젓가락이 한 벌.

 

그리고, 메모장이 한 장.

 

읽어보니.

 

 

「토츠카 에게

 

상당히 피곤해 보여서, 그대로 자게 뒀어. 사실은 침대에 옮겨주려고 했지만, 토츠카가 안된다고 해서 그만 뒀어.

 

배고프면, 저녁을 테이블 위에 올려뒀으니까 렌지로 데워서 먹어.

 

그리고 냉장고에 냉두부도 있으니까 이것도 좋을 대로해.

 

만약 먹었다면 나중에 감상 들려주면 기뻐.

 

그리고 샤워 하고 싶으면 써도 되니까. 타올은 선반에 있는 걸 적당히 써.

 

미안하지만 나도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서 자도록 할게.

 

만약 토츠카가 먼저 나가게 되면, 열쇠는 현관에 있으니까 잠그고 우편함에 넣어둬 주면 돼.

 

내가 먼저 나갈 때는, 열쇠는 토츠카가 가지고 있어줘. [화분 아래] 라든가는 부주의 하니까.

 

뭐 적당히 어디서 만나서 돌아오면 되겠지.

 

그럼 잘 자.」

 

 

── 정말로, 그녀는 상냥한 사람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써주고.

 

지금 내가 덮고 있는 모포도,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도, 아마 그녀의 배려겠지─

 

라고 생각하며, 그녀가 자고 있을 침대로 눈을 돌렸더니.

 

 

그녀는 너무나도 무방비하게 자고 있었다.

 

이불은 다 걷어차고, 이쪽을 향해 사지를 드러내놓고 있다.

 

티셔츠에 체육복이라니, 색기 하나 없는 모습일 텐데.

 

내게 있어서, 그것은 어떤 그라비아 보다 자극적이었다.

 

밑단을 걷어 올린 체육복에서 뻗어 나온 늘씬한 다리.

 

가지런하게 놓인 예쁜 모양을 한 무릎.

 

의외로 육감적인 허벅지로부터 시선을 옮기니, 옷 사이로 날씬한 허리가 드러나 있었다.

 

숨 쉴 때마다 새하얀 배가 들썩이고, 귀여운 배꼽이 살짝살짝 엿보였다.

 

위에 입고 있는 무늬 없는 얇은 티셔츠는 그녀의 날씬한 신체를 숨기기는커녕 강조해서, 어렴풋이 속옷 라인까지 비치고 있었다.

 

그 옷깃 사이로 보이는 요염한 쇄골에,

 

땀으로 젖은 가녀린 목덜미에,

 

유혹하듯 살짝 열린 입술에.

 

나는 마치 달콤한 물에 모이는 반딧불이처럼 이끌려──

 

 

 

 




── 꼬르륵, 하고 배가 울렸다.

 

 

..........아무래도 나는 상당히 공복이었나 보다. 

 

그것을 인식하는 동시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위험했다.....도대체 내 윤리관은 어디로 가고 있었던 것일까.

 

정신 차려, 토츠카 사이카. 이런 마음의 흔들림으로 인한 행동으로 그녀의 신용을 배신해서는 안 돼.

 

그래, 그녀는 그저 나를 신용하고 있을 뿐. 마음을 놓고 있는 것뿐이니까──

 

 

 

──정말로 그런 걸까?

 

내가 아는 그녀는 총명하고, 다른 사람의 몇 배는 경계심이 강한 여성이지 않았던가.

 

그런 그녀가, 남자와 하룻밤을 함께하는 위험성에 생각이 미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렇게 무방비한 것은, 나 에게는 [그것] 이 허용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혹시, 나는 유혹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꿀꺽, 하고 침을 삼키고──

 

 

 

 

 

 

──또다시, 꼬르륵, 하고 배가 울렸다.

 

......역시 나는 상당히 배가 고픈 거 같다.

 

차려진 밥상을 먹지 않는 것은 남자로서 수치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밥상]인지 아닌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밤은 길고, 앞으로의 인생도 길다.

 

초조해 하기에는 아직 이른 거겠지.

 

 

일단 여기서는, 그녀가 확실하게 준비 해준 다채로운 [밥상]을 받기로 하자.

 

 

 

──아직 밤은 기니까.

Posted by 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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